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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일][01월02일][365매일글쓰기] 지혜로움


[002][0102][365매일글쓰기] 지혜로움

어제 우연히 토론회를 봤다. 주제는 <왜 언론은 불신의 대상이 됐나?>였다. 네 명의 패널이 자신의 의견을 나누고 토론을 했다. 그 토론을 보고 있자니, ()임금이 저절로 떠올랐다. <중용(中庸)> 6장에서 공자(孔子)는 순()임금이야말로 매우 지혜로운 분이라고 극찬했다. 왜 그랬을까?

동양고전을 읽다보면 순()임금이 자주 등장한다. 요순(堯舜)시대의 그 순임금이다. 태평성대라고 알려진 요순시대를 유학자들이 두고두고 그리워하는 이유는 요임금이 왕위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효자로 이름난 순에게 왕위를 선양(禪讓, 임금이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줌)했고, 순임금 또한 그러했기 때문이다. 순임금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이는 치수(治水)사업을 완수한 우()였다. 우임금부터는 자식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나라 이름은 하()였다.

()임금은 대효(大孝)로 유명하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20190610일에 쓴 글을 이 글 아래에 덧붙이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순임금이 왜 지혜로운 사람인가에 대해 논해보자.

첫째로 순()임금은 무엇이든지 묻기를 좋아하셨다 好問고 한다. 우리는 언제 질문하는가? 대부분의 경우, 모르기 때문에 질문한다. 아이들이 어른에게 하늘은 왜 파란가요?”라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 질문을 통해 알고자 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몇 년 전 동아리에서 논어(論語)를 공부할 때, 학우(學友)들은 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했다. 공자께서는 인()을 무엇이라고 정의하지 않고 인()을 이루는 방식을 이야기해 주었는데, 그 방식이 질문마다 다 달랐다. 인색한 사람에게는 좀 더 베풀도록하고, 성격이 급한 사람에게는 여유를 이야기하는 식이었다. 책으로만 읽는 우리로서는 무척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학우들은 틈만 나면 인()이 뭐냐고 물었다.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란 사람다움이며 인()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이 진정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였다.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상대방의 기질에 맞게 답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아리 밖에서도 나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책도 읽어보고, 선생님께 질문도 해봤다. 책 속에서 혹은 선생님의 답 속에서 점점 더 인()에 다가갈 수 있었다. 마치 술이 익어가는 것처럼 질문을 거듭하는 동안, ()은 내 안에서도 서서히 자라나서 나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이것이 질문의 힘이다.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호문好問은 상대방의 무지(無知)를 일깨우는 작업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무지를 일깨우는 작업이며, 자신의 지식을 시중화(時中化, 그 때의 사정에 알맞게 함)하는 작업이며, 자기자신을 겸손하게 비우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과정이다. <중략> 자기를 비우고, 아는 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는 것이 없는 것처럼 그 상황상황에서 묻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지식의 획득방법인 것이다. 모든 지식은 반드시 살아있는 시중(時中)의 지식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죽은 지식은 도서관의 서가에 얼마든지 꽂혀있다.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삶의 상황 속에서 우리의 앎 그 자체를 끊임없이 되물어야 하는 것이다. - <중용 한글역주> 293페이지, 도올 김용옥, 통나무

나는 도올 선생의 책 속에서 질문의 또 다른 형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함으로써 더 큰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나의 질문 ()이란 무엇인가?”를 돌이켜 보면, 처음에는 분명 인()을 알듯말듯해서 질문을 시작했었다. 몇 번의 토론 후에 나는 인()A라고 정의를 내리고서는 ()A라고 단정지었다. 어느 날 학우 중 한 사람이 다시 질문했다. “()이란 무엇인가?” 나는 자신있게 답했다. “()A이다.” 그랬더니 다른 학우들이 ()B인데!” “()C.”라고 외쳤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의 생각은 맞은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후로 우리는 때때로 ()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토론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공부를 했고, 각자가 아는 바를 꺼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인()을 사전적인 의미가 아닌 자신의 삶 속에서 확장시켜 나갔던 것이다.

둘째로 순()임금은 비근한 말들을 살피기를 좋아하셨다 好察邇言고 한다. 비근한 말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는 주위에서 흔히 보고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깝고 알기 쉽다이다. 사람은 가까운 사람의 말을 적당히 무시하는 경우가 흔하다. 주변에서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다가도 TV에서 전문가가 한 마디 하면 바로 따른다. 왜 그런 걸까? 이것은 내가 더 많이 안다는 자만심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되는 전문가의 말은 기꺼이 들지만, 나보다 모른다고 생각되는 주변 사람들의 말은 흘려듣는 것이다. 비근한 말을 살핀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 주변 사람들의 언행 속에서 배울 것을 찾는다는 뜻이다. 순은 아내들의 충고를 귀 담아 들었기 때문에 죽음을 모면할 수 있었다. 임금이 된 후에도 저자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들었다. 이것으로 순임금은 배우기를 좋아하고(好學) 실천에 힘쓴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순()임금은 사람들의 추한 면은 덮어주시고 좋은 면을 잘 드러내주시었다 隱惡而楊善고 한다.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SBS<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보면, 아이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을 하면 칭찬을 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했었다. 이 프로그램을 본 많은 부모들이 이 방법을 따라했었다. 나의 경험을 반추해보면, 비난을 받으면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에 행동이 바뀌기 보다는 관계가 틀어지고는 했다. 여러 자기계발서에서 상대방에게 나쁜 뉴스를 전하지 말라는 내용이 자주 언급되는 이유도 이와 같다. 나쁜 뉴스를 전하는 순간, 나와 나쁜 뉴스의 이미지가 겹쳐져서 상대방은 나를 나쁜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타인이 기필코 그 사람의 잘못을 콕 찔러 후벼파면, 그 사람은 그 타인에게 반발하고 원한을 품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대신에 그 사람의 잘한 점을 칭찬하면, 칭찬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노력하게 된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행동이 교정된다. 이것이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가 사회에 준 교훈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원형은 EBS<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고양이를 부탁해>KBS<개는 훌륭하다>에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심지어 반려동물도 칭찬과 격려를 통해 행동 교정이 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것을 수천 년 전의 순임금이 실천했다고 하니 놀랍지 않은가!

넷째로 순()임금은 어느 상황이든지 그 양극단을 모두 고려하시어 그 중()을 백성에게 적용하시었다 執其兩端, 用其中於民라고 한다. ‘양극단은 어떤 문제나 주제에 대한 모든 가능한 극단적인 주장이다. ‘양극단을 모두 고려한다는 가능한 극단적인 주장을 모두 듣고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 행위는 무척 어렵다. 하나의 일에 대해 둘셋, , 백으로 나뉘는 의견을 청취하는 행위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정성(精誠)과 인내(忍耐)를 요구하는 일이다. ()은 무얼 말하는 것일까? 현대인은 중()이라 하면 중간을 떠올린다. 그러나 유학에서의 중()은 단순히 중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의 중()은 무슨 뜻일까? 하나의 일에 대한 여러 의견을 수렴하고 난 후에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상황에 맞는 올바른 판단이다. ‘()을 백성에게 적용한다는 말은 현 시점에서 백성들을 위해 가장 적합한 방안을 도출하고 시행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순임금은 항상 다양한 방식으로 의견을 듣고나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임금은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측근의 말만 듣지도 않았다. 세력이 큰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순임금의 지혜는 항상 묻고 경청하고 그 상황에 맞는 판단을 내리고자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나온다. 여러 의견을 골고루 듣되 어느 특정 세력에 휘둘리지 않고 대의(大義)를 위한 결정을 내리는 지도자는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순임금을 칭송하고 성인(聖人)으로 받든 것이다.

성인(聖人)이 성인인 까닭은 단지 그 마음이 천리(天理)에 순수하고 인욕의 섞임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순금이 순수한 까닭은 단지 그것이 지닌 성분이 넉넉하여 구리나 아연이 섞이지 않았기 때문인 것과 같다. 사람은 천리에 순수한 데 이르러야 비로소 성인이며, 금은 성분이 넉넉한 데 이르러야 비로소 순금이 된다. 그러나 금의 무게에 가볍고 무거움이 있는 것처럼, 성인의 재질과 능력도 역시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중략> 비록 보통 사람이라도 기꺼이 배워서 이 마음을 천리에 순수하게 만들면 역시 성인이 될 수 있다. 마치 한 냥의 금을 일만 일에 비교한다면, 무게는 비록 현격하게 다르지만 그 순도에 관해서는 부끄러움이 없는 것과 같다. (맹자가) “사람은 모두 요순(堯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다. 배우는 사람은 성인이 되기를 배우는 것은 인욕을 제거하고 천리는 보존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마치 금을 정련하여 충분한 순도를 구하는 것과 같다. - <전습록 1> 272~273페이지 왕양명, 청계

참고도서 : <중용 한글역주>, 도올 김용옥, 통나무

글자수 : 3570(공백제외)
원고지 : 22.35

#연금술사 #365매일글쓰기 #숭례문학당 #중용 #순임금 #하고싶은말이많은날

[스물두 번째][20190610][백일글쓰기] 세상에서 가장 불효한 자식이었던 순임금

마을 사람 가운데 아비와 자식 사이에 소송을 제기하여 선생께 판결을 청한 자가 있었다. 시중드는 사람은 그들을 막고자 했으나, 선생께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선생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 부자는 서로 껴안고 통곡하고는 돌아갔다. ◈ 시명치(柴鳴治)가 들어와 물었다.: 선생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길래 그들을 그토록 빨리 감동시켜서 뉘우치게 했습니까? 선생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순()임금은 세상에서 가장 불효한 자식이었고, 고수(瞽瞍)는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아버지였다고 말했다. ◈ 명치가 놀라서 가르침을 청했다. ● 선생께서 말씀하셨다.: 순임금은 항상 자신이 가장 불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효도할 수 있었고, 고수는 항상 자신이 가장 자애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애로울 수 없었다. 고수는 다만 순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키워 왔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는지만 기억하였고, 자신의 마음이 이미 후처(後妻)로 옮겨간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자신은 자애로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더욱 자애로울 수 없었다. 순임금은 오직 부친이 어린 자신을 돌볼 때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셨는데 지금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효도를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만 생각하며, 날마다 효도를 다하지 못한 이유를 생각했기 때문에 더욱 효도할 수 있었다. 고수가 마침내 기뻐하게 되었을 때도 또 자기 마음의 원래 자애로운 본체를 회복한 것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후세에 순임은 고금에 가장 효성스런 자식이라 일컬어졌고, 고수 역시 자애로운 아비가 되었다. - 『전습록 실천적 삶을 위한 지침 2775~776페이지, 왕양명, 청계

위의 인용문을 처음 잃었을 때, 이렇게 괴상한 이야기가 있나 싶었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었다. 여러 번 읽어도 보고, 해설도 읽어 봤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학우가 질문을 했다. 순임금은 대효(大孝)라고 알려진 인물인데, 세상에서 가장 불효한 자식인가? 이야기를 더 전개하기 전에 필자의 경험담을 들어보고 나면, 더 이해가 쉬울 듯하다.

수업을 듣기 위해 필동으로 가는 지하철에서 필자는 애처로운 소리를 들었다. “여러분, 좋은 하루 되세요. 불쌍한 늙은이에게 조금만 보태주세요. 아주머니도 좋은 하루 되시고, 학생도 좋은 하루 되어요.” 누군가가 돈을 주었나보다. 애절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주머니 복 많이 받으실거예요. 감사합니다.” 같은 말을 세 번이나 반복했다. 수업 전까지 읽어야 할 책을 급하게 읽어내려 가던 내 앞에 그 목소리가 들린다. “불쌍한 늙은이를 조금만 도와주세요.” 책을 보면서 지갑을 꺼냈다. 천 원을 꺼내려 했는데, 오천 원이 나왔다. 그냥 드렸다. 또 다시 고맙다고 한다. 주위의 어떤 아저씨가 한 숨을 쉰다. 환승역에 도착해서 인파에 휩쓸려 내렸다.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그 할아버지의 뒤에 서게 되었다. 잠깐 내 눈을 의심했다. 굽었던 허리는 반듯하게 펴져서 뒷짐을 지고 있다. 주머니에서 모자를 꺼내 쓰는데 눈빛이 매섭다. “아이쿠, 속았네!”

아침부터 내 돈 오천 원이 날아갔다. 기분이 나빴을까? 전혀 아니었다. 지하철 안에서 그 할아버지는 도와달라고 하면서도 연신 사람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구슬프지만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듯이,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삶을 무게를 짊어진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책에 집중하던 내게 목소리가 들린 것은 덕담처럼 퍼지는 인사말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사기꾼이라도 돈을 주겠다는 결심이 섰던 것이다. 비록 그 할아버지는 돈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속였지만, 필자는 그 할아버지의 인사에 대한 답례로 돈을 건넸다.

다시 순임금의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의 대상인 아버지 고수가 순임금이 효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동안은 순임금은 효자가 아니다. 따라서 순임금은 자신이 불효(不孝)하다고 생각하고 더욱 더 정성스럽게 아버지 고수에게 효()를 행했다. 결국 아버지 고수가 순임금의 효()를 인정하자, 순임금은 대효(大孝)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순임금은 아버지 고수가 자애로운 아버지라고 생각했으므로, 아버지 고수는 순임금에게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또한 아버지 고수도 스스로를 자애로운 아버지로 여겼기에, 아버지 고수는 아들인 순임금을 죽이려 했음에도 자애로운 아버지였던 것이다. 아버지 고수가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자, 아버지 고수는 순임금이 기억하고 있던, 원래의 자애로운 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의 가치는 상대적이다. 남들이 보는 나와 실제의 나는 다를 수 있다. 우매하고 눈먼 아버지 고수처럼 되지 않으려면, 순임금처럼 지혜롭게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 물론 순임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는 쉽지 않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순임금의 지혜로운 처신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글을 마치기로 한다. 아래는 순임금의 일화를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요약한다.

<<순의 어머니가 죽자, 순의 아버지 고수는 새 아내를 맞아들였다. 고수와 계모 사이에는 상()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고수는 상을 총애했다. ()임금이 순의 사람됨됨이를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딸 두 명을 순에게 시집보냈다. 그러자 계모와 상은 순을 질투하여 순을 죽이려 마음먹었다. 고수가 순에게 식량창고 지붕을 수리하게 하자, 계모와 상은 사다리를 치우고 불을 질렀다. 순은 아내들의 충고로 가져온 삿갓을 양쪽에 날개처럼 펴고 뛰어내려 살아남았다. 고수가 순에게 우물을 파게 하자, 계모와 상은 돌로 우물을 메워버렸다. 순은 아내들의 충고대로 우물 측면에 굴을 파두었고, 이 굴로 나와 살아남았다. 순은 끝까지 고수와 상이 자신을 고의로 죽이려 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결국 고수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순을 해치려 마음을 더 이상 먹지 않았다고 한다.>>

글자수 : 2197
원고지 :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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