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일][04월13일][365매일글쓰기] 각자의
시작은 이러했다
장면 1
고조(한고조 유방)는 콧날이
높고 이마는 튀어나와서 얼굴 모습이 용을 닮았으며, 멋진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왼쪽 넓적다리에는 72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사람됨이 어질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탁
트인 마음에 언제나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던 그는 일반 백성들의
생산작업에 얽매이려고 하지 않았다. 장년이 되자 시험으로 관리에 등용되어 사수정(泗水亭)의 정장(亭長)이 되었다. <중략> 고조가
일찍이 함양(咸陽)에서 부역하고 있을 때, 한번은 황제(진시황)의
행차를 구경하는 것이 허락된 적이 있었는데, 진 시황제의
행차를 구경하고서는 길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 대장부란
마땅히 저래야 하는데”라고 하였다. - <사기본기> 253-254페이지, 사마천,
까치
장면 2
항적(項籍)은 하상(下相) 사람으로 자는 우(羽)라고 하며, 처음에 군대를 일으켰을 때 나이가 24세였다. 그의 계부는 항량(項梁)이며 항량의 부친은 초(楚)의
장수 항연(項燕)으로 진(秦)의 장수 왕전(王翦)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다. 항씨는 대대로 초의 장수로서 항(項)의 제후로 봉해졌으므로 성을 항씨로 하였던 것이다. <중략> 항량은 사람을 죽이고 항적과 더불어 원수를 피해서 오중(吳中)으로 갔는데, 오중의 현명한 인재들이 모두 항량의 밑에서 나왔다. 오중에 요역(繇役)과
상사(喪事)가 있을 때마다 항량은 항상 주관하여 일 처리를
하였는데, 은밀히 병법을 사용해서 빈객과 젊은이들을 배치하고 지휘하여 이로써 그들의 재능을 알아두었다. 진 시황이 회계산(會稽山)을 유람하고 절강(浙江)을
건너는데, 항량과 항적이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항적이
말하기를 “저 사람의 자리를 내가 대신할 수 있으리라”라고
하니, 항량이 그 입을 막으며 말하기를 “경망스러운 말을
하지 말아라. 삼족(三族)이
멸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항량은 이 일로 하여
항적을 범상치 않은 재목이라고 여겼다. 항적은 키가 8척이
넘고 힘은 커다란 정(鼎)을 들어올릴 만했으며 재기(才氣)가 범상치 않아 오중의 자제들조차도 이미 모두 항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 <사기본기> 211~212 페이지, 사마천, 까치
장면 3
(조조가 말한다.) “모름지기
영웅이란 가슴에는 큰 뜻을 품고, 뱃속에는 좋은 꾀를 숨기고, 우주를
끌어안는 기틀과 천지의 뜻을 삼킨 자여야 하오.”
현덕이 묻는다.
“당대에 그런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씀입니까?”
조조가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으로 유현덕을 가리키고 다시 자신을 가리킨다.
“지금 천하영웅은 사군과 이 조조뿐이외다!”
현덕은 그 말에 소스라치듯이 놀라서 들고 있던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때
마침 큰비가 쏟아지려는지 우레소리가 크게 울렸다. 현덕은 천연스레 몸을 숙여 떨어뜨린 젓가락을 집으며
혼잣말처럼 되뇌인다.
“무슨 천둥소리가 이리 대단한고......”
그 모양을 보고 조조가 웃으며 묻는다.
“아니 장부도 천둥을 무서워한단 말씀이오?”
“성인도 심한 천둥소리와 세찬 바람에 얼굴빛이 변하였다는데, 어찌 두렵지 않겠소이까?”
유현덕은 조조가 영우이라 설파하는 데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린 것이나, 때마침
크게 울린 천둥소리를 빙자하여 적당히 얼버무려 넘겼다. 이에 조조도 현덕의 소심함에 실소를 머금으며
더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 <삼국지 2권> 218페이지, 나관중 지음,
황석영 옮김, 창비
한고조 유방은 시골 작은 마을의 관리였지만, 그에게는 사람을 끄는
능력이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그가 술집에 들어가면
사람들이 그와 함께 술을 마시러 몰려들고는 했다고 한다. 그가 학문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한고조 유방이 처한 시기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가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시기였다. 중국의 짧은 통일은 얼마 못가 끝나고 천하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한고조
유방은 부역에 동원된 죄수들을 장안 인근의 여산으로 끌고 가던 중에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고 자신도 도망친다. 이것은
진나라의 혹독한 정치에 대한 저항이었다.
50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고 진나라가 통일을
하였으나, 당시에는 지역마다 언어, 문자, 도량형, 풍습 등이 달랐다. 각기
다른 지방을 하나로 통일하자 곳곳에서 불만이 튀어나왔다. 애초 진나라는 법가들의 나라였다. 일찌기 진 효공은 위앙(상앙)을
재상으로 삼아 엄격한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중국을 통일한 후 진나라는 “모든 일을 법에 의해서 결정하고, 각박하여 인의, 은덕, 우호 따위가 없어야 오덕(五德)의 명수(命數)에 부합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법령을 엄하게 하여 법을 어긴 자는 오랫동안 죄를 용서받지 못했다.-<사기본기> 161페이지” 통일이 된 이후, 이런
저런 이유로 크고 작은 법을 어긴 사람들이 모두 죄수가 되었으니 그 원성이 대단했을 것었다. 진시황이
죽자, 불만은 곧바로 반란이 되었다.
한고조 유방이나 항우 모두 반란군이었으며, 진나라를 멸망시켜 스스로
황제가 되기를 꿈꾸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진나라는 멸망했고, 제후들은
서로 싸웠다. 당시에 누가 한고조 유방이 최종 승자가 되리라 예측이나 했겠는가! 한고조 유방은 사람을 끌어모으는 재능이 있었고, 그의 곁에는 인재들이
많았다. 또한 한고조 유방은 출신이 미천했기 때문에, 인재들의
말을 잘 듣고 따랐다. 이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삼국지>에서
유비(유현덕)은 한고조 유방과 비슷한 처지이다. 그는 황실 종친이기는 하지만, 당시 종친의 수는 너무 많았다. 게다가 유비(유현덕)은
가난한 시골 청년에 불과했다. 후한이 망할 조짐이 보이자, 유비(유현덕)는 황실을 지키고자 분연히 일어섰다. 유비 또한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나 보다. 그의 주변에는 인재들이
많았다.
<삼국지>에서
조조는 높은 자리에 있던 할아버지 덕에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환관이었다. 부유해서 명문가 자제들과 어울렸지만, 조조의 신분은 미천했다. 조조는 자신의 처지를 잘 알았다.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유함
덕분에 조조는 인재를 모을 수 있었다. 조조는 총명했고 야망이 컸기에 인재를 극진히 모셨다. 인재들의 조언에 따라 황실을 지키자는 대의를 세웠고, 죽음의 위기에
처한 황제를 구하여 극진히 모신다. 황제 덕에 대의명분은 조조에게 있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한나라이지만 황제 덕에 조조는 한나라 승상이 되었다.
한편 유비(유현덕)는 여포에게
땅을 빼앗기고 조조에게 의탁하게 된다. 당연히 조조의 세력 하에 있는 황제와 만났고, 황제는 족보를 확인한 후 유비를 황숙이라 부르게 되었다. ‘황숙’ 유비에게도 대의명분이 생겼다. 조조와 달리 유비에게는 대의명분만
있을 뿐 돈도 군대도 없었다.
조조는 황숙이 된 유비(유현덕)을
경계한다. 그래서 천하에 영웅은 당신과 나뿐이라고 공언한다. 조조
입장에서는 적이 커지기 전에 싹을 자르려는 것이었지만, 유비입장에서는 목숨이 위태로웠다. 그래서 유비는 능청스럽게 연기를 한 것이다. 이후 조조가 방심한
사이 유비는 냅다 도망쳤다.
위촉오의 삼국시대가 오기 전까지 조조와 유비(유현덕)을 비롯한 각지의 영웅들은 패권(覇權)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서로 싸웠다. 진시황이 죽자 유방(한고조)과 항우를 비롯한 각지의 영웅들도 패권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서로 싸웠다.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의 그들은 모두 야망이 컸다. 패배하는
자는 항상 자기 통제를 못했다. 자만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실수를 남발했다. 반면에 승자는 항상 자기 자신을 낮추고 인재들의 조언을 귀담아 들었다. 각자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고, 설득을 통해 방향을 정하면 최선을 다해 행동했다. 이것이 패배자와 승자의 차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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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 17.7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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