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일][02월27일][365매일글쓰기] 1936년
영국북부 탄광지대의 목욕시설
1928년 버마에서 돌아온 25세의
조지 오웰은 부랑자 생활을 시작했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혹은 따라지 인생)>에 묘사된 정말 말 그대로의 밑바닥 생활은
약 2년 동안 지속되었다. 1931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 완성된 후, 1932년 조지 오웰은 서점에서 파트타임으로 약 2년간 일했다. 이 때의 경험으로 가난이 어떻게 한 인간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는지를 그린 <엽란을
날려라>를 집필했다.
그 이후, 1936년 조지 오웰은 북부 탄광지대의 실업문제를 취재하러
떠났다. 그는 1936년 1월
31일부터 3월 25일까지
북부 탄광지대 이곳저곳을 탐색했고, 이 기간에 보고 들은 일들을 일기로 남겼다. 1937년에는 이 일기를 기반으로 정부 통계와 기관지의 자료를 덧붙여진 <위건부두로
가는 길>이 완성된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20세기초 노동계급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명작이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노동문제들이 제시되어 있는데, 조지 오웰이
노동현장에서 광부들과 대화하고 함께 체험하면서 도출된 것들로 광부들을 위해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문제들이었다. 조지
오웰이 제시한 문제들 중 일부, 예를 들어, 주택, 임금, 실업수당 등의 문제는 21세기의
노동현장에 여전히 남아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오늘은 은행나무에서 출판한 <영국식 살인의 쇠퇴>라는 제목의 책에 엮여 있는 <위건 피어로 가는 일기> 중에서 광부들의 목욕과 관련된 내용을 발췌하고 간단히 의견을 덧붙이고자 한다.
G가 탄광에서 돌아와 세수를 하고 밥을 먹었다. 그런데 늘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는 광부들이 입술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새까만 모습, 이를테면 크리스티 민스트럴 쇼(백인이 흑인 분장을 하고 흑인 노예의
삶을 희화한 쇼)의 배우 같은 모습으로 식탁에 앉아 밥을 먹는 것을 자주 보았다. 사실 붉은 입술도 밥을 먹으면서 저절로 씻겨 깨끗해지는 것이다. G가
집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은 머리는 말할 것도 없고 온몸이 잉크처럼 새까맸다. 그는 큰 대야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씻는데 상의를 벗고 철저하게 씻어나간다. 우선 손부터 씻은 후 팔뚝 이마, 가슴, 어깨, 얼굴, 머리 순으로 씻는다. 그런 다음 몸을 말리고 아내가 등을 씻어준다. 배꼽에는 아직 탄진이 가득 들어 있고, 상체만 씻은 셈이라 허리
아래는 여전히 새까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부들은 공중목욕탕에 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가지 않는다. 이 말에 너무 놀라지 마시라. 광부들은
일하고 자는 시간을 빼면 남는 시간이 거의 없다. 새롭게 지은 시영주택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목욕시설이
갖춰진 광부의 집은 없다. 갱도 입구에 목욕시설을 갖춘 석탄회사들이 있긴 하지만 극히 드물다. – 122~123페이지
탄광에는 목욕시설이 없었다. 게다가 주택문제도 심각했다. 광부들은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된 낡은 집을 임대해 살았다. 당연히
오래된 집엔 목욕시설이 없었다. 변소 조차도 여러 집이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집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막장에서 석탄을 캐는 작업에는
분진이 앞을 볼 수 없을 정도 일어난다. 광부가 작업을 끝내고 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새까매 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옷 속까지 석탄가루가 새어 들어간다. 조지
오웰은 막장 체험을 하고 나서 바로 욕조에서 몸을 씻었지만, 욕조에 온 몸을 담궈도 잘 씻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지경인데도 외부 사람들은 광부들은 씻는 것을 싫어한다는 가짜 뉴스를 유포하고 믿었다. 광부들이 씻기 싫어하니 광산 소유주들은 목욕시설을 만들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자본주의의 폐해였다.
반즐리의 공중목욕탕은 더러웠다. 욕조는 턱없이 부족했고 깨끗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목욕탕 크기를 보고 욕조가 기껏해야 50개(실제로는 19개) 정도밖에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곳 반즐리는 인구가 7만이나
8만 정도 되고 주민 대부분이 광부들이다. 새로 지은 시영주택을
빼고 목욕시설이 갖춰져 있는 집은 없다. – 126~127페이지
광부들의 수입은 낮았다. 겨우 한 가족이 먹고 살 정도였다. 그래서 그들의 집안에는 가구가 거의 없었으며, 이불도 부족했다. 겨울이면 외투를 덮고 자야 할 정도로 이불은 귀했다. 또한 광부들의
삶은 무척 바빴다. 하루에 겨우 5~6시간 정도의 수면을
취하고 일을 하러 나가야 했다. 작업은 3교대로 이루어지만, 집에서 탄광까지 이동하는 시간과 탄광에서 막장까지 이동하는 시간은 작업시간에 포함되지 않았다. 특히나 갱도입구에서 석탄을 캐는 막장까지 이동 시간은 편도로 적게는 1시간에서
많게는 3시간이 걸린다. 북부 탄광지대 어디를 가나 목욕시설은
부족했다. 어쩌다 목욕시설이 있다해도 시간 여유가 없어서 이용할 수 없거나 생활비가 부족해서 이용하지
못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광부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갱구 옆에 목욕탕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 목욕탕이 석탄회사가 설치해 놓은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사실은 광부들이 출자한 복지기금으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퍼스한테서 들어 알았다. 이곳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광산의 목욕시설이 다 이런 식인지 좀
더 알아봐야겠다. 그런데 이것은 광부들이 목욕탕을 원하지도 않고 고맙게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 된다. 모든 광산에 목욕탕을 설치하고 있지 않은 한 가지 이유는, 석탄을 거의 다 파낸 탄갱의 경우 목욕탕을 지을 가치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 134~135페이지
조지 오웰은 여러 곳의 막장을 체험하러 갔다. 어느 곳에서 갱구 옆에
목욕탕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는 당연히 회사가 만들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오, 그럴리가! 자본가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광부들이 돈을 모아 만들 것이었다. 오직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유자본주의의 폐해가 섬뜩하다.
이 탄광은 목욕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찬물과 더운물이 나오는
샤워기가 적어도 1천 개쯤 되었다. 광부는 1인당 두 개의 라커를 할당받는데 각각 광부복과 평상복을 넣어둔다(이렇게
따로 보관되기 때문에 평상복을 깨끗이 입을 수 있다) 그래서 광부는 깨끗하고 말쑥한 차림으로 출퇴근할
수 있다. 목욕탕은 광부 복지기금으로 지어지는 경우도 있고, 인심
좋은 탄광 소유주와 탄광회사가 지어주는 경우도 있다. - 140페이지
현대식 장비를 갖춘 그림소프 탄광은 조지 오웰이 보기에도 훌륭했다. 이처럼
훌륭한 탄광이 영국 전역에 딱 한 곳만 있다는 것이 문제이지만 말이다. 이곳의 막장에는 ‘스킵 왜건’이란 특수 장비가 설치되어 있어서 그 장비를 보기 위해서
조지 오웰은 고생을 무릅쓰고 막장까지 내려갔다 올라왔다. 그리고 나서 발견한 목욕시설과 라커는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영국 전역의 탄광이 그림소프 탄광과 같은 시설을 갖출 수 있을까? 아마 그렇게 되기 전에 탄광의 석탄이 고갈되어 버릴 것이다.
1936년 당시에는 석탄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석탄에서 석유로 에너지원이 전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익이
나지 않아 문을 닫는 탄광이 늘어 실업자들도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지 오웰은 북부 탄광지대의
노동 환경이 매우 열악함을 알게 되었다. 탐사 중에 남긴 일기의 내용은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 그대로 등장한다. 조지 오웰이 조사한 내용을 덧붙여져서 훌륭한 보고서가 되었다. 그러나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고, 조지 오웰은 12월에 스페인으로 건너가 의용군에 입대하여 참전했다. 1937년 5월 큰 부상을 입고 제대한 후, 영국으로 돌아와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출판했다.
북부 탄광지대를 탐사하면서 남긴 일기와 <위건부두로 가는 길>의 내용은 정확히 일치한다. 항상 그렇듯이 조지 오웰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글로 썼다.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은 생동감이 넘치고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이것이 바로 1945년 출판한 소설 <동물 농장>과 1948년
완성한 소설 <1984>가 대중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게 된 이유이기도 한다.
글자수 : 2960자(공백제외)
원고지 : 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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