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2일][02월11일][365매일글쓰기] 악의 평범성 4편 – 노예 같은 순종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있어” 혹은 “우리가 왜 이런 대접을 받는거지?” 나를 포함한 여럿이서 함께 한다면 모를까, 이문장은 엄밀히 말하면 잘못되었다. 말을 하는 주체인 ‘나’는 ‘나’이외의 타인의 생각을 알 수 없다. 같은 환경, 같은 상황이라도 개체별로 생각은 다 다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나는 열심히 일하고 있어” 혹은 “나는 왜 이런 대접을 받는거지?”로 바뀌어야 한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라는 표현 속에는 ‘나’의 개별성을 지우고 무리 속으로 숨으려는 의도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나’의 판단이 아니라 내가 속한 그룹 전체의 판단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잘되면 나의 성과이고 잘못되면 타인의 잘못이라는 심리가 녹아 있다. 이것을 한나 아렌트는 ‘동조의식’이라 말한다. 다른 표현으로는 ‘묻어가기’가 있다.
아렌트 : 달리 말하면 그들은 그냥 남들에게 동조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들은 만사에 동조할 준비가 돼 있었어요. 누군가 그들에게 “우리와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당신은 고작 우리 중 한 사람일 뿐이야”하고 말하면 그들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죠. (중략) 페스트 : 맞는 말입니다. 실제로 아이히만은 미국인들에게 감금당하자 누군가 다른 사람의 리더십에 복종할 수 있게 돼서 기뻤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법정이나 신문, 예비 신문에서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할 준비가 돼 있던 그의 기이한 태도는, 아마도 그가 어떤 종류의 권위건 현존하는 권위라면 거기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과 동일하게 해석됩니다. 권위라면 그게 어떤 종류건 실현 가능한 한계까지 순종할 준비가 돼 있었다는 거죠. - <한나 아렌트의 말> 92페이지, 한나 아렌트, 마음산책
‘나’를 ‘우리’에 종속시키는 동조를 극단적으로 방향으로 발전시키면 순종이 된다. 무리에 속하기 위해 무리의 의견이 나와 달라도 동조할 수 있다. 그러기를 반복하다 보면, 무리의 의견에 습관적으로 무조건 따르게 된다. 이것이 순종이다. 아이히만은 자기 자신은 노예처럼 복종했다고 말했다. 그는 명령을 따랐을 뿐, 책임은 윗선에서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기 자신이 왜 재판을 받아야 하냐며 분노했다. 윗선은 책임을 모면하고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했다는 논리였다. 그러면 그의 윗선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의 윗선은 이미 자살했거나 처형을 당했다. 이토록 어처구니 없는 아이히만의 멍청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춘 아이히만에게서 왔다. 그저 누군가의 노예이기를 자처했던 아이히만에게서 왔다.
여기서 잠시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다. 학창시절, 나는 무수히 많은 단체체벌을 받았다. 반의 누군가가 잘못을 하면 반 전체가 손바닥을 맞거나 책상에 올라가 의자를 들고 벌을 서거나 운동장을 돌았다. 회사에서는 팀의 누군가가 잘못을 하면 팀원 전체의 고과를 한 등급 내렸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나’라는 개인을 내세울 수 없다. 끊임없이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는 말을 듣다보면, 사회 구성원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윗사람의 지시에 순종하는 것을 택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의 개념을 읽는 순간 공포에 휩싸였다. 내가 스스로 변하지 않았다면 나 또한 아이히만과 같은 악행을 아무런 생각없이 지시에 따라 수행했을 수도 있겠다는 자각이 들어서였다. 개인 스스로가 생각하기를 멈추면,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을 서슴치 않고 할 수 있다. 전체주의 문화는 개인의 생각을 말살한다. 실제로 수많은 조직에서 SSKK(시키면 시키는대로 까라면 깐다)를 외쳤다-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른다. SSKK야말로 전체주의의 산물이다. 바로 아이히만이 그 예이다.
글자수 : 1411자(공백제외)
원고지 : 8.9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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