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일][01월24일][365매일글쓰기] 홍어
아주 어렸을 적, 나는 할아버지집 우물 곁에 있었다. 할아버지였을까? 할머니였을까? 우물
곁에 나무 도마를 두고 바로 직전에 숫돌에 간 날선 식칼로 홍어회를 뜨고 있었다. 잘 삭아서 뼈를 중심으로
붉은 빛이 퍼지는 두툼한 홍어를 얇게 저미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냄새가 독했다. 처음 보는 고기에 대한 호기심으로 옆에 바짝 붙어서 구경했다. “한
점 먹어볼래?”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것은 먹어봐야 한다. 새콤달콤한 초장을 듬뿍 찍은 홍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코가 톡
쏘여서 기겁했다. “우리 손주, 잘 먹네” 주변의 경탄에 어깨가 으쓱으쓱. “더 먹고 싶어요.” “왕할머니 드시고 나면 더 줄께” 우리 할아버지는 효자이다. 왕할머니께서 좋아하시는 홍어를 집안 행사때마다 준비하셨다. 홍어회를
뜨고, 두툼한 조각은 홍어찜을 하고, 자투리로는 홍어회를
하셨다. 왕할머니는 홍어회와 홍어찜을 드셨고, 우리는 홍어무침을
먹었다. 어쩌다 남은 홍어회를 먹을 때면, 입에서 살살 녹았다. 어릴 적, 나는 홍어회에 매료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날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제사나 명절 때마다 홍어찜과
홍어무침은 만들지만, 홍어회는 절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만드신 홍어찜과 홍어무침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물론 제사상과 차례상에는 홍어무침은 올라가지
않는다. 두툼한 홍어찜만 올린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포항에서 10년을 살았다. 포항에서는
홍어를 볼 수 없었다. 고급 요리집에나 가야 먹을 수 있는 홍어 음식을 돈 없는 청년이었던 나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포항에는 재래시장표 잡어회가 있었다. 만 원어치 사서 친구들과 게눈 감추듯이 먹었다. 포항 토박이를 친구로
사귀게 되었다. 그녀의 집에 갔더니, 가자미식혜를 반찬으로
주었다. 가자미를 양념해서 밥과 함께 삭힌 가자미식혜는 동해안의 고유음식이라고 했다. 가자미 말고 상어로도 식혜를 만든다고 했다. 20대의 나는 가자미식혜에
매료되었다.
취직해서 서울로 올라왔다. 어느 날 시내출장을 나갔다가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데, 직장선배가 홍어삼합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홍어?” 얼마만에 들어본 말인가! 당연히 가야지! 직장선배는 동부이촌동에 사는 부자였다. 그날 홍어 삼합을 얻어먹고
기분이 좋았다. 단, 그날 먹은 홍어는 어렸을 적 먹은 홍어와
많이 달랐다. 어렸을 적 먹은 홍어회는 적당히 삭았고, 두툼했으며, 살짝 붉은 색이 돌았었다. 그날의 홍어는 너무 삭았고, 얇았으며, 온통 붉었다. 메뉴판에서
원산지를 확인하고는 왜 다른 지를 알게 되었다. 어렸을 적 먹은 홍어는 흑산도산이었고, 할아버지께서 정성으로 항아리 안에서 삭힌 홍어였다. 그날의 홍어는
외국산이었다. 그래도 정말 오래간만에 먹는 홍어였다. 너무
삭아서 코가 시렸다.
결혼을 했다. 명절 때마다 홍어를 무쳤다. 남편은 삭힌 홍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시부모님도 삭힌 홍어를
좋아하시지 않는다. 전라북도에서는 삭힌 홍어를 안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시댁은 싱싱한 홍어로, 홍어찜도 하고 홍어무침도 한다고 했다. 싱싱한
홍어를 사러 어시장에 갔다. 어시장에는 푹 삭힌 홍어만 있었다. 서울이든
인천이든 다 똑같았다. 명절은 다가오는데, 싱싱한 홍어를
구하지 못했다. 가자미라도 살 요량으로 집 가까이에 있는 백화점 식품관에 갔다. 예전에 그곳에서 작은 가자미를 사서 무쳐먹은 적이 있었다. “어, 싱싱한 홍어다!!!” 명절을 앞두고 어물전 얼음위 가자미 옆에 작은
크기의 홍어가 누워있었다. 게다가 갓 잡은 싱싱한 홍어란다. 무려
서해안 산이었다. 그 때부터 명절마다 홍어무침을 해서 시댁에 가져갔다.
처음에는 삭히지 않은 홍어가 어색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싱싱한 홍어에도 매료되었다.
오늘도 홍어를 무쳤다. 홍어 손질은 남편이, 야채 준비는 내가, 무치는 것은 우리 세 가족이 둘러 앉아 했다. 나와 아이는 홍어를 무치는 남편에게 훈수를 두었다. “식초를 더
넣어야 해” “싱거워. 소금 더!” “마늘을 너무 조금 넣은 것 같아” “깨는 언제 넣어?” 셋이서 즐겁게 무쳤다. 덕분에 역대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홍어무침이
완성되었다. 흐믓했다. 남편이 가장 좋아했다. 무친 홍어를 시댁에 배달하고, 저녁식사는 홍어무침을 반찬으로 먹었다. 느무느무 맛있었다! 그래 이것이 명절이지!
글자수 : 1627자(공백제외)
원고지 : 10.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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