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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일][11월22일]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083][1122][백일글쓰기2]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할아버지에게는 검지 한 마디가 없었다. 너무 오래되어서 어느 쪽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소꼴을 베다가 손가락이 잘렸다고 하셨으니, 오른손 검지일 듯하다. 그 손으로 할아버지는 작두로 소꼴을 베고는 하셨다. 나는 그 앞에 앉아서 할아버지가 또 손가락을 자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지켜보고는 했다. 손가락 한 마디가 없어도 할아버지는 뭐든 척척 해내셨다. 배봉지를 씌우는 일도, 홍시를 따는 일도, 모심기도, 우렁잡기도 못하는 일이 없으셨다.

할아버지는 여러 동물들을 키우셨다. 소는 물론이고 강아지가 마당을 뛰어놀았다. 병아리를 친 앎탁이 마당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가장 특이했던 동물은 거위였다. 어느 해에 하얗고 큰 오리 몇 마리가 등장했다. 큰 오리라고 하자, 거위라고들 했다. 과연 오리와는 다른 주둥이를 가지고 있었다. 거위와 나는 키가 비슷했다. 어린 나는 강아지 등을 타고 노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거위 등을 타고 놀았다. 할아버지께서 대경실색을 하시며 나를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셨다. 거위가 마루 위에 눕혀놓은 간난아기를 부리로 쪼아 죽게 할 정도로 공격성이 강하다는 경고였다. 그 뒤로 나는 거위들을 피해다녔다.

설이 다가오자, 연을 날리고 싶었다. 다들 설이 되면 연을 날렸다. 마을 아이들이 연줄 끊기 놀이했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도 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고는 했다. “이번 설에는 나도 연을 꼭 날릴꼬야.” 그래서 할아버지는 방안에서 대나무 살을 깎으셨다. 손이 두툼해도 검지 한 마디가 없어도 대나무 살을 얇게 깎는 손길은 정교했다. 옆에서 나도 해보겠다고 졸랐지만, 위험하다고 못하게 하셨다. 할아버지께서 만들어주신 연은 방패연이었다. 다들 가오리연을 날렸기 때문에 방패연은 낯설었다. 거의 울 것 같은 손녀의 표정에 방패연이 가오리연보다 고급연이라며 너는 특별하니까 만들어준거라며 너스레를 떠셨다. 다음 날, 두툼한 옷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후 연을 날리러 갔다. 드디어 연 싸움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흥분했다. 그런데 왠 걸. 할아버지는 논둑 비탈진 곳의 경사면에 나를 눕히고 실패를 쥐어 주셨다. 연은 이미 하늘 높이 올라가 있었다. “연싸움은?” 하지만 할아버지는 추우니까 여기에서 꼼짝 말고 있으라며 일을 시작하셨다. 결국 스릴 넘치는 연싸움은 못했다.

학교에 들어갔다. 콧물을 질질 흘릴까봐, 왼쪽 가슴에 가제 손수건을 옷핀으로 꼽고 학교에 갔다. 할아버지는 마을 이발소에 나를 데리고 가셨다. 까치머리를 얌전하게 다듬어달라고 주문하셨다. 그런데! 이발사는 촌스럽게 깍아주셨다. 뒷머리는 파르르할 정도로 짧게 깍고, 귀 옆은 귀를 덮게 하고, 앞머리는 짧게 잘라 이마 위에 일자로 내려오게 하는 정말 촌스러운 머리였다. 거울 보고 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옆에서 할아버지가 연신 이쁘다고 하셨다. 결국 외갓집에서 외삼촌한테 실컷 놀림만 받고 왔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에게 삐져서 째려봤다.

예민한 사춘기가 왔다. 나는 왠지 모든 것이 부끄러웠다. 여드름 난 얼굴도 부끄러웠고, 엄마가 거리에서 내 이름을 불러도 부끄러웠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내 주위에 결계를 치고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서류를 떼러 면사무소에 갔다. 무척 부끄러워하며 민원창구에서 쩔쩔매며 서류를 떼다가 문득 눈을 드니 할아버지께서 면사무소안에서 직급이 높은 분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또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 나를 덮쳤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모른 채 했다. 정말 대책 없는 사춘기였다. 집에서 할아버지를 봤을 때, 그 때 죄송했다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또 부끄러움이 나를 포섭해버렸다. 그래서 방으로 쪼르륵 달려가버렸다. , 이게 아닌데.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오랫동안 아프셨다. 할아버지를 묻고 온 날 밤, 아버지는 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꺼이 꺼이 우셨다. 나는 아버지의 통곡을 들으며, 할아버지를 회상했다. 약간 무심한 듯하지만 속정이 깊었던 할아버지. 항상 열심히 일해서 집안을 일으켰던 할아버지.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를 닮았고, 나는 그런 아버지를 닮았다. 따라서 나는 할아버지를 닮았다.

글자수 : 1589(공백제외)
원고지 : 10.23

#연금술사 #백일글쓰기 #숭례문학당 #나의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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