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일][08월26일][365매일글쓰기] 분노와
방황
적반하장러들로 인해 부글부글 화가 들끓자 눈꼬리가 올라가고 눈동자에서 레이저가 쏟아져 나왔다. 머리 속은 시뻘건 용암으로 가득찼다. 뉴스를 피하려 해도 TV에서 흘러나오는 앵커와 리포터의 말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화가 켜켜이 쌓여갔다.
올해 봄 이탈리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사망했다. 그들 다수는 노년층이었다. 코로나19는
노년층에게 치명적이었다. 부모님과 시부모님을 향한 애틋한 마음은 다른 사람들의 부모님들로 확대되기 마련이다. 나의 부모가 소중하다면 다른 이의 부모 또한 소중한 법이다. 어르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내 자신을 코로나19로부터 지켜야만 했다. 내
자신이 안전해야 내 가족이 안전하고 내 주위가 안전해진다. 그래서 밖에 나갈 때는 마스크를 썼고 불필요한
외출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몇 개월인가!
그런데 8월 들어 60대
이상의 확진율이 늘어났다. 수개월 동안 코로나19 취약층을
위해 했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한마디로 허탈했다. 이대로라면
나의 부모님과 시부모님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공포도 함께 따라왔다.
그러던 중에 기가 막힌 소식을 듣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서울 성북구의 사랑제일교회에 다니는 어르신이 있는데 코로나19 진단검사를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를 믿을 수 없어서 검사를 받지 않겠단다. 만 하루 동안 공무원과
경찰이 설득했으나 계속되는 완강한 거부에 부딪혔다. 그러는 사이에 서울에서 광화문 집회에 참석한 할머니로부터
손주가 감염되었다는 뉴스가 올라왔다. 내가 사는 동네는 삼대가 사는 가정이 많다. 대형 평형이 많기 때문이다. 검사를 거부하는 어르신도 자식 내외와
손주와 동거하고 있을 터였다. 한숨이 나왔다.
나는 왜 그동안 어르신들을 걱정했을까? 가고 싶은 여행도 카페도 맛집도
대형 쇼핑몰도 갈 수 있었지만 참았다. 위험이 줄어들 때까지 모든 것을 유예했다. 영화관에서도 마스크를 쓴 채로 영화를 봤다. 식당에서는 음식을 포장했고
카페에서 테이크아웃을 했고 장은 짧은 시간 동안 서둘러서 봤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그래도 꾹 참았다. 왜? 만약 내가 감염되면 나와 가까운 사람들 또한 감염되기 떄문이었다. 감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다 보면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에게까지 해를 끼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 한들 부모님 세대에 코로나19가 퍼지면 나의
부모님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눈꼬리가 저절로 올라가고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이 보이면 레이저가 저절로 뿜어져 나왔다. 나의 몸이 분노에 사로잡혀 활활 타올랐다.
마음 속에 가득 찬 분노로 인해 생각이 거칠어졌다. 이대로 글을 쓰면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내
몸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까지 글을 쓰지 않는다”였다.
태풍이 올라오는 이 밤에 나는 글을 쓴다. 태풍의 거센 바람이 아파트
외벽만 뜯어낼 것이 아니라 가짜뉴스와 방역당국에 대한 불신까지 날려버리기를 희망한다. 오늘은 이 글을
쓰지만 내일 또 글을 쓰리라는 보장은 없다. 내 마음과 몸이 다시 분노에 빠지게 되면 나는 다시 방황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중3인 아이는 8월 15일 이후로 집안에만 있다. 누가 이 아이에게 삶의 즐거움을 빼앗나? 아이와 친구는 전화통화를 하면서 집 근처에 확진자가 나왔다며 조심해야 한다고 서로 다짐했다. 중3도 타인을 위해 자신의 즐거움을 접는데 왜 그들은 그러지 못하는가? 중3도 정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 부지런지 정보를 탐색하는데 왜 그들은
그러지 못하는가? 답답함에 가슴만 멍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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