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일][07월12일][365매일글쓰기] 불편함과의
대면 – 니체
니체라고 하면 바로 떠오른 말이 있다. “신은 죽었다” 많이 들어서 자동으로 튀어나올 정도이다. 그런데 왜 니체는 그런
말을 한걸까? 그리고 무슨 뜻일까?
채사장은 니체가 근대 철학의 문을 닫고 현대 철학의 문을 연 사람이라고 한다.
인류의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구분하는데, 구분하는 기준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공유했던
세계관이다. 고대에는 신화를 믿었고, 중세에는 유일신을 믿었다. 근대에는 과학기술과 수학통계를 기반으로 이성을 숭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대는 새로운 기준을 세우는 대신 근대의 이성중심주의에 반대하고 합리주의에서 벗어나려 한다. 현대를
대표하는 개념은 반이성, 탈중심, 해체, 다원성이며 이들은 모두를 ‘탈근대’라고
본다.
그러면 현대는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던 1945년부터이다. 니체는 1833년에 태어나 1900년에
생을 마쳤다. 20세기가 막 시작되려는 시점에 니체는 근대의 문을 닫았다. 왜 그런가?
니체는 자신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근대의 유럽인들이 병들었다고 진단했다.
병명은 나약함과 왜소함이다. 그에 따르면 중세와 근대의 2천년을
지나오면서 유럽의 문화와 사상은 타락했고 퇴폐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러한 질병을 가져온 직접적인
요인이 바로 그리스도교와 이성중심주의다. - <열한계단>,
‘네 번째 계단, 철학’, 채사장, 웨일북
21세기인 지금도 전세계의 50%의
인구가 중세의 진리인 유일신 종교(그리스도교,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근대에는 이 보다 더 많은 인구가 유일신 종교를 믿었을
것이다. 인간은 과거의 가치관과 단절하지 못하고 세대를 이어 계속 이어간다. 그런데 왜 니체는 그리스도교를 비판한 것일까?
플라톤은 그리스 철학을 정리하여 기록을 남긴 철학자이다. 그가 쓴
글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은 세상을 둘로 나누어 봤다. 좋음과 나쁨 혹은 이데아와 실체들 혹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등. 플라톤은 피타고라스 학파와의 교류를 했고 수학을 중시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떠올려 보자. 직각삼각형에서 직각을 낀 두 변의
길이를 각각 a, b라고 하고 빗변의 길이를 C라고 하면
a의 제곱 더하기 b의 제곱은 c의 제곱과 같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모든 직각삼각형 실체들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플라톤에게는 개념(이데아)이 실체보다 중요했다. 그러므로 이데아는 좋은 것이다. 개념(이데아)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므로 좋은 것이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영향을 받아 세상을 둘로 나누어 보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리스도교는 천국과 인간 세계로 나누어 본다. 이데아인 천국은 좋은
것이 되고 인간 세계는 나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은 모두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타락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현실 세계보다는 천국을 위해 살게 된다. 바로 이점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다.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 다시 말해서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내가 발 딛고 있는 구체적 현실로 돌아오라는
니체의 제안이다. 이상적이고 불변하는 본질의 세계 같은 것은 없다. 초월적
세계의 잡히지 않는 그 무엇만을 추구하다가 현실의 건강함을 짓밟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다. 신의 죽음 필요하다. - <열한계단> ‘네 번째 계단, 철학’
한편, 현실 세계는 나의 가치관과 달랐다. 순종적인 사람보다는 주체적이 사람이 더 앞서 나간다. 복종적인 사람보다는
강인한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서 도드라진다. 겸손하고 절제하는 사람보다는 자유롭고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이
성공한다. 사회 생활을 하면서 나의 가치관을 수정해야만 했다. 주체적이고
창의적이며 주인 의식이 있는 사원이 되어야만 했다. 나는 사장이 아니고 일개 사원인데? 왜? 21세기 기업은 사원들의 복수를 두려워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노예는 지금 어떤 마음 상태일까? 그들은 증오심에 가득 차 있다. 약하고 무능력한 노예들은 현실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대신 정신적인 측면에서 복수를 꿈꾸게 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나, 상상
속에서는 모든 것을 전복시킬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은 인위적인 도덕 체계를 고안하게 된다. - <열한계단> ‘세 번째 계단, 불교’
노예들이 구축한 도덕 체계는 무엇일까? 그리스인들은 주인을 좋은 사람으로
구분한다. 주인은 강하며 우월한 사람들이다. 주인은 주체성, 강인함, 자유,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 반면에 노예는 나쁜 사람이다. 저속하고
비천하며 열등한 사람들이다. 노예는 순종, 복종, 겸손, 절제, 노예답게
행동할 것을 강요받는다.
증오심에 사로잡힌 노예들은 ‘주인은 악하다’고 정의한다. 주인은 탐욕스럽고 음란하며 신을 거역하는 죄인이다. 그리고 ‘노예인 자신은 선하다’고
정의한다. 따라서 노예에게 요구되었던 순종, 복종, 겸손, 절제는 가치로운 덕목이 된다. 이것이 노예들이 만든 도덕 체계이다.
니체는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한다. 그리스도교적 사상이 서구의
문화를 병들게 했다고 진단한다.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도덕성은 원한과 증오에서 출발한 노예의 도덕에
기반을 둔다. <중략> 유다인들은 로마의 식민지
노예였다. 오랜 기간 노예 상태로 지배받았던 무력감은 결국 유다인들의 영혼 속에 지워지지 않는 원한과
증오를 남겼다. 그리고 그러한 원한과 증오는 형이상학적이 개념으로 정립되면서 새로운 도덕 체계로 탄생한다. 그것은 노예의 도덕, 원한과 증오의 도덕의 기원이다. 문제는 유다인의 가치 체계가 그리스도교로 이어졌다는 데 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교가 유럽 전체로 퍼져나가면서, 노예의 도덕은 오늘날 유럽인의 도덕 체계로 자리 잡게 되었다. - <열한계단> ‘세 번째 계단, 불교’
식민지인이었던 유대인들은 노예의 도덕 체계를 세웠다. 로마인은 악하다. 그리고 유대인은 선하다. 그리고 이 도덕 체계는 그대로 그리스도교에
녹아들었다. 이렇게 해서 원한과 증오의 도덕이 유럽인 마음 속에 장착된 것이다. 스스로 초라하고 수동적인 존재가 되기를 자처한 것이다. 니체는 바로
이것이 문제라고 봤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에게 초인이 되라고 한다.
초인은 삶의 태도를 바꿈으로써 자기 자신을 극복한 존재를 말한다. 특히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그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세계에 사로잡히지 않은 존재다. 그는 대지에 속해 있으며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존재다. 그리고
신이 죽은 세상의 허무를 긍정하는 주체적인 존재다. - <열한계단> ‘네 번째 계단, 철학’
채사장은 철학으로 사고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사전에 따르면 철학이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입시교육에 익숙한 나는 시험을
잘 보는 방법은 알았을 뿐, 내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다.
동양고전을 읽기 전의 나는 무지했다. 동양고전에서 시작해서 다양한 분야로 독서를 확장하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나의 생각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있다. 오늘 다시 서양 철학사를 꺼내 들었다. 채사장 덕분에 힘을 얻어 끝까지 재빠르게 읽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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