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일][06월28일][365매일글쓰기] 알지
못하면서 행하는 사람
子曰蓋有不知而作之者아 我無是也로라 多聞하여 擇其善者而從之하며 多見而識之가知之次也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대개 알지 못하면서 행하는 사람이 있으나
나는 이러한 것이 없다. 많이 듣고 그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고 많이 보고서 기억해 둔다면 아는 것의
다음이 된다.
2018년 초가을이었다. 나는
화이트 보드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화이트 보드 위에는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辯), 독행(篤行)” 8 글자가 적혀 있었다. 지난 날의 목마름을 한 순간에 날려버린
8글자였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공부의 한 귀퉁이만을 끄적거리다가
학문의 세계에 막 들어선 기쁨에 전율했다. 이것이 《중용》과의 첫 대면이었다. 당시의 나는 배우고 실천하는 데에 온 몸과 마음을 집중했다. 사서(四書)를 읽고 성리학과 양명학을 배우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실천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해의 가을과 겨울은 처참한
실패로 남았다. 왜 그랬을까?
첫 번째 원인은 한쪽으로 치우친 공부였다. 늦게 시작한 인문학과의
첫 만남이 《연암집》이었던 만큼 동양고전을 향한 애정이 철철 넘쳤었다. 심지어는 “나는 서양의 것과 맞지 않다”라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했다.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동서양이 섞이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이 학문의 중심이었지만,
21세기인 지금은 다르다. 20세기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은 서양식 교육을 받고 서양문화에
익숙하다. 그런데도 동양 사상에만 매달렸으니, 인식의 균형이
깨져 버린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빠져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다.
널리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했다. 그래서 무작정 독서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었다. 서양의 저작물을 읽으면서 새삼 내가 참으로 무지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식했다. 큰 성과였다. 다시 겸손한 자세로 돌아가, 읽은 내용을 하나 하나씩 신중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써내려갔다. 물론 처음부터 잘되지는 않았다. 하루하루 꾸준히 노력하며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좋아지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두 번째 원인은 내적 수양 부족이었다. 책과 강의를 통해 아는 것이
많아진 만큼, 내면도 함께 넓어졌어야 했지만, 실제는 그러지
못했다. 쌓은 덕(德)이
부족하니, 배운 것을 다 익히지 못했으며 때로는 배운 것과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고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섣부른 지식이 주는 폐해였다.
아는 것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의필고아(意必固我)도 마음 속에 뿌리내렸다. 이를 알아차린 나의 무의식은 끊임없이 사욕(私欲)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경고했지만, 지식을 긁어 모으는데 열중하느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많이 알면
알수록 나의 편견은 더 굳어졌고 앎에 더 집착하고 내가 옳다고 고집을 부리고 눈앞의 상대를 이기려고 했다. 종국(終局)에는 사욕에 완전히 사로잡혀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의필고아(意必固我)에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한 선택은 칩거였다. 홀로 책을 읽으며 배운 것을 하나씩 자세히 따져 묻기 시작했다. 비판적 책 읽기를 시도해 봤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나의 뇌는
수용은 잘하지만 비판에는 약했기 때문에 비판적 책 읽기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조지 오웰의 저작물을 읽게 되었다. 영국인으로서
식민통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영국사회의 허영심을 비판하는 조지 오웰의 글을 읽으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 비판은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함을 알게 되었다.
나는 SNS를 한다. SNS로
맺은 친구는 현실 세계의 친구와는 다르다. SNS에는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이야기가 흥미있으면
친구 신청을 하고 친구가 된다. 이렇게 해서 SNS에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서로 얼굴을 맞대지 않는 만남을 이어가는 도중에 참으로 난감한 일이 생겼다. 사회 이슈별로 SNS 친구들이 사분오열된 것이다. SNS에서는 격렬한 말로 자기 의견을 펼치고 상대방을 깍아 내리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SNS친구들이 주장을 꼼꼼히 살펴보던 중에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어떤
사람은 무작정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대부분은 지리멸렬한 신문기사였다. 즉, 가짜 뉴스를 근거로 주장을 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구체적인
통계와 연구 결과를 근거로 자기 주장을 했다. 어느 쪽에 더 신뢰가 갈까? 당연히 구체적인 근거를 대는 후자이다. 이렇듯 적절한 비판이 되려면
구체적인 근거가 필요하며 구체적인 근거는 사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비판적 책 읽기도 같은 원리로 동작한다. 책의 내용을 분명하게 분별하려면
사실 확인이 우선이다. 사실 확인은 역사적 사실일 수도 있고, 사회
통계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기록일 수도 있다. 따라서 비판적
책 읽기를 하려면 책과 관련된 주변 지식을 확보해야 한다. 책의 서평이 있다면 여러 편 읽어보면 도움이
된다. 이렇게 하면 저자의 의도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인 독서가 가능하다. 책의 내용과 연관된 다른 책을 함께 읽으면 책의 내용을 더욱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독서법은 책 한 권으로 여러 권을 읽게 하고 저자들의 의견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책의 내용의 옳고 그름까지
판별할 수 있게 한다. 마지막은 책의 내용과 관련된 연구 논문을 찾아 읽는 것이다. 요즘은 세계 곳곳에서 발표된 논문들을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구할 수 있다. 게다가
인터넷에는 자동번역기가 있어서 논문의 언어에 구애 받지 않고 학자들의 주장을 빠르게 읽어낼 수 있다. 학자들은
대개 깊은 사유를 기반으로 논문을 작성한다. 또한 하나의 논문이 발표되면 다른 사람들이 그 논문을 인용하여
찬반을 표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논문은 사실 확인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비판적 책 읽기를 시작하자 내 자신의 오류가 더욱 더 잘 보였다. 어쩜, 이리도 많은 오류가 있단 말인가! 부끄러웠다. 부끄러워지자 칩거기간이 더 늘어났다. 칩거한지 일년이 다 되어가는데, 나의 인생에서 요즘처럼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때때로
사회 이슈로 울컥하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내가 왜 욱하는지 내 마음을 자세히 살펴본다. 내 안의 오래된 상처와 트라우마가 발견되면 스스로를 다독거린다. 이제
괜찮다고 말해준다. 간혹 내 안의 비루함을 발견할 때면 마음이 착잡하다.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감감하다. 비루함을 알아차리는 것 자체로도
문제가 해결될 때도 있지만, 오랜 기간 쌓여 고질병이 되어버린 경우에는 그저 내버려두고 지켜봐야만 한다. 묵묵히 지켜보면서 스스로 치유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럴 때 나는
중용 20장의 한 대목을 되새긴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대 능하지 못하면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대 알지 못하면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대
결말을 얻지 못하면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분변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변할진대 분명하지 못하면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할진대 독실하지 못하거든 도중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남이
한 번에 능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하십시오. - 《중용 한글 역주》 529페이지, 도올 김용옥, 통나무
나의 마음을 바르게 유지할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기꺼이 내 안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다시 해낼 수 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분명하게
보고 듣고 느낄 수만 있다면 날 것 그대로의 나의 감정과 대면하여 그것이 넘쳐흐르지 않도록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노력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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